부끄럽다

2008/06/02 22:04
물대포에 찢겨진 5월 마지막 ‘햇살’
[촛불 현장 연쇄 기고] 소설가 김연수
폭력의 밤 따위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웃으며 정부에 말하던 순간은 갔는지도…
한겨레
» 촛불문화제를 마친 뒤 청와대 인근 삼청동 들머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시민·학생 등이 1일 새벽 막아선 경찰에게 김밥 등 먹거리를 건네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그 햇살은 2008년 5월의 마지막 햇살이었고, 참으로 따뜻했다. 서울시청 앞 잔디밭에 앉은 내 오른쪽에는 여고생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유모차에 앉은 아이와 앞쪽 무대를 번갈아가며 보는 젊은 엄마가 피켓을 흔들었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다른 사람들은 다 박자에 맞게 구호를 외치는데, 뒤에서 엉성한 발음으로 한 박자 늦게 “이멍바근 무러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세 살 정도밖에 안되는 꼬마였다. 어쩌면 나는 5월31일은 많은 가족들과 함께 정말 한가롭고도 따뜻했던 오월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던 날로 기억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 다음날 새벽, 비폭력을 외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물대포를 쏘고 폭력적으로 진압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아름다운 장면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사람을 실신시킬 정도의 엄청난 수압으로 뿜어대던 그 치졸하고도 더럽던 물대포의 물줄기 같은 것은, 단지 도로를 점거했을 뿐 그 어떤 폭력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던 시민들을 향해 협박을 서슴지 않았던 그 여경의 구역질나는 목소리 따위는, 결국에는 자신의 친구이며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며, 어쩌면 훗날 자신이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르는 여성들이 마치 먹잇감이라도 되는 듯 으르렁대던 전경들의 그 구호 소리 따위는 말하지 않으련다.

하다못해 청와대 수석이라도 나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까는 소박한 기대를 지닌 시민들이 무서워 물대포와 전경들과 그 구역질나는 여경의 협박 뒤에 숨어 있던 비겁한 자들 따위는, 경찰은 시민들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니 자기들이 먼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할 리가 없으리라고 믿고 쉴 새 없이 ‘비폭력’을 외치는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린 자들 따위는, 자신이 한국에 없는 동안 곧 해임시킬 장관에게 고시를 발표시켜 책임을 전가하고는 돌아와 제일 먼저 소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며 끝까지 비폭력을 외쳤던 시민들에게 경찰특공대 투입으로 소통을 시작한 자 따위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들 따위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내가 본 젊은 친구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밤이었으나, 가로등도 모두 꺼버린 어두움 밤이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진압당하거나 그 모습을 지켜본, 그토록 어둡고 끔찍한 밤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밤이 아름답고 행복한 밤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 친구들 덕분이었다. 투구와 방패와 물대포로 무장한 진압경찰에 맞서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며 비폭력을 유지한 그 친구들이 있었기에 내게 그 밤은 한없이 밝고 환했던 밤으로 기억되리라.

» 소설가 김연수(오른쪽)씨가 31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가해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나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온몸으로 물줄기를 맞고 선 사람들을 보았다. 또 나는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물대포를 막기 위해 전경버스 위로 올라가 자신의 몸으로 물줄기를 가로막는 사람들을 보았다. 또 나는 앞쪽에서 물대포에 맞아 사람들이 쓰러지는 모습에도 분노를 애써 삼키며 “비폭력! 비폭력!”이라고, 또 “쏘지 마! 쏘지 마!”라고 애원하고 간청하고 부탁하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왜 저들은 자신의 친구이며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며, 어쩌면 훗날 자신이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르는 여성들에게 저토록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느냐고. 지금이 2008년이고, 여기가 대한민국 서울이 맞느냐고.

5월31일 오후 7시 가까울 무렵, 여러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서울시청 앞 잔디밭에서 내가 느꼈던 그 따뜻했던 햇살은, “아, 흡사 이건 소풍 온 것과 같구나”며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햇살은, 어쩌면 정말 마지막 햇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08년 5월의 마지막 햇살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적인 나라의 국민들처럼 평화롭고도 한가롭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부에 말할 수 있었던 시절의 마지막 햇살 말이다. 그냥 산책을 나가듯이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청계천이나 시청 앞으로 가서 서로 깔깔대고 웃으며 정부를 향해 “그건 국민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니 다시 생각해봐달라”고 말할 수 있었던 시절의 마지막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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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지영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나오는 책은 몰라도 예전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렸던 작품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겪었던 386세대의 아픔을 재탕 삼탕하는 넋두리식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반면에 또 나는 386세대의 작가들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래도 자신이 몸소 겪은 정치적, 경제적인 일들을 자신의 글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묵직한 공통의 글감이라도 있었으니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나에게 오늘 김연수 작가의 위와 같은 기고문을 읽게 되었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충분히 먼 훗날에도 우리의 기억에 남는 중대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방관자의 자세로 시국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는 내앞에도 글로라도 풀어내고픈  정신나간 정부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도
나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밥벌이를 핑계삼아 모든 걸 눈감아 버린다.
 
어쩌면 공지영 작가가 그렇게 재탕 삼탕 하며 글에 자신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자신있게 쓸 수 있었던 건
그녀도 역시 지금의 김연수 작가처럼 그 시위현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같이 비겁하게 뒤에 숨어 자신의 안락함이나 쫓다가 주어 들은 이야기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녀도 시위현장에서 폭력진압에 몸을 다쳐가며 세상을 경험하였기에 그런 글이 나오지 않았을까.




Posted by 설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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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동률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미로운 멜로디 때문에 그의 노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내가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감하는 가사말 때문이다. 최근 그의 앨범 <Monologue>중 네 번째 곡인 ‘Jump'를 들으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밝고 경쾌한 리듬에도 불구하고 노래 가사가 서른을 벌써 넘긴 지금의 나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기에...


‘Jump'가사의 일부분이다. 아직 모든 게 신기한 / 내 스무 살 때처럼 / 새로운 내일에 설레하며 / 가슴이 뛰고 싶어 / 이제는 나를 깨우고 싶어 / 또 다른 나를 찾고 싶어 / 어디서부터 무엇부턴진 몰라도 / 한 번 달려가 볼까 / 덜컥 저지르는 용기와 / 두둑한 배짱을 갖고서 / 열정에 가득 차 나를 불사를 / 그 무언가가 필요해 /


이 노래를 들었을 때의 그 오묘한 느낌을 나는 최근에 또 한 번 느낄 기회가 있었다. 바로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살, 도쿄>를 읽으면서이다. 저자만의 독특한 해학이 넘쳐나는 재밌는 문체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십대가 아닌 나의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청춘소설 <스무살, 도쿄>. 주인공 다무라에 겹쳐지는 나의 이십대를 되돌아보다 보니 어느새 나는 삼십대인 현재의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다무라 히데오는 18살에 재수공부를 핑계로 도쿄로 상경한다. 음악평론가가 되길 바라던 그는 단지 여자를 많이 만날 수 있을거라는 이유 하나로 국문과에 입학, 동기생과 풋풋한 첫사랑을 한다. 이후 집안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작은 광고회사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워나간다. 경기가 좋아 친구들 몇 명과 독립하여 자신의 사무실을 갖고 있고 좋은 여자친구도 있는 상태로 이십대의 마지막을 보낸다.


책은 다무라의 이십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 예를 들면 존 레논의 사망, 88올림픽 선정결과, 일본 유명인들의 중요 사건 등을 함께 보여준다. 이는 마치 한 개인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맞물려 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 각자는 세상에 홀로 인 것 같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나의 실제 이십대도 다무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개의 여고에 5개 반이 있던 작은 시골 도시에서 대학교 입학을 계기로 서울로 유학와서 이십대를 시작했다. 겨우 몸만 뉘일 수 있는 작은 방에 하숙을 하면서 학교 선배와 첫사랑을 했고 무난하게 졸업을 했다. 전공과 관련 있다 싶어 들어간 회사는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울생활을 하기 위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직장생활을 했다. 그 사이 몇몇 남자를 만나 시시한 연애를 했고 특별할 것 없는 삼십대를 맞았다.


다만 내가 다무라와 다른 건 호경기 시대가 아닌 불경기 시대에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나는 여전히 넉넉지 않은 월급을 받아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 무엇보다 삼십대를 벌써 세 해나 맞고 있으면서도 이십대를 그리워하며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 다무라와는 다른 점이다.


이런 상태의 내가 이 책을 읽었으니 왜 울고 싶지 않았겠는가. 지나간 이십대가 그리워서 울고 싶었고 초라하기만 한 삼십대가 속상해서 울고 싶었다. 방황만 하던 이십대의 나에게 미안해서 울고 싶었고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삼십대의 나에게 죄스러워 울고 싶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책은 내가 울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차라리 속시원하게 울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나 자신한테 보이는 눈물도 부끄러워 울 수가 없다. 아직도 우는 것으로 스스로를 연민하는 내가 더더욱 싫어질 것만 같아 울 수가 없다. 왜 나는 다무라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걸까. 나에게는 정말로 세상의 어려움들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모두 사라진 걸까.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영영 자취를 감춘 것일까.


<스무살, 도쿄>를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그저 이웃 나라의 유머러스한 작가가 재미로 썼다고 생각하기에는 나에게 많은 물음을 던져준 이 청춘소설을 내 삶의 터닝포인트로 삼겠다고 하면 좀 오버일려나. 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때문에 나는 이십대 같은 마음으로 삼십대를 살아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으니 나에겐 충분히 ‘바이블’과도 같은 의미의 책이 될 수 있으리라. 





Posted by 설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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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해봤다. 그냥 친구로 지내던 그가 남자로 느껴지기 시작한 걸 깨달은 건 호칭때문이었다. 어느날부터 그가 부르는 ‘누나’라는 호칭이 싫었다. 장난스럽게 ‘야’라고 불러주던 그 호칭에 하루종일 설레였고 ‘요’자가 사라진 말에 기뻤으며 이름이라도 불러주는 날에는 마냥 좋아 하늘을 붕붕 떠다녔다. 하지만 연애는 끝났고 지금은 그저 그런 기억들만이 가슴 한켠 어디쯤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와 나는 두 살 차이였다. 그리 크지 않은 나이차이였건만 만난 시기가 애매했다. 한 참 결혼 문제 때문에 고민할 나이에 만난 두 살 연하는 그저 두 살 차이가 아니었다.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분명 나는 결혼이란 제도에 연애를 끼워맞추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미안한 건 이 점이다. 사람만을 보지 못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염두해 두었다는 것.


암튼 이런 전적 때문일까 <연하연애>란 제목의 이 책을 보았을 때 가슴이 저릿했었다. 책속의 연하연애가 해피엔딩이면 현실의 실패한 내 연애가 가슴 아플 것 같았고 반대로 책 속에서마저 이별의 연애얘기라면 앞으로 다시는 연하의 남자를 욕심낼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내려 갔다.


책에는 삼십대인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는 서른여섯 이혼녀인 커리어우먼 아사코, 사키라는 귀여운 딸을 혼자 키우는 서른다섯 싱글맘 미나코, 그리고 유부남과의 사랑을 끝내고 서른이 넘어 프랑스로 유학가는 서른둘의 백수 미호. 이 세 여자가 태어나 처음 해보게 되는 연하남과의 연애 얘기.  


그녀들은 포부도 크게 12살 연하의 알바족 남자, 8살 연하의 계약직 부하직원, 5살 연하의 외국인 남자와 연애를 한다. 아~~ 나의 두 살 차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대담한 그녀들. 그녀들의 연애 결론은 이렇다. 띠동갑 알바족과 연애하는 미나코는 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간다. 8살 연하 부하직원과 연애를 했던 아사코는 결국 그와 헤어진다. 그리고 5살 연하의 프랑스남자와 연애하던 미호만이 결혼에 골인한다.


저자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연하와의 연애도 결국은 대다수의 연애와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연하 남자와의 만남은 헤어질 수도 있고 힘들게 연애를 이어갈 수도 있으며 혹은 결혼이란 종착까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연하의 남자를 만나도 연애는 그저 연애인 것이다. 특별날 것도 유별날 것도 없는 것이다.


물론 통상의 상식에 들어맞는 절차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데 연하 남자와의 만남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을 생각하고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신경쓰이는 것이 남자의 나이이니까. 하지만 그 나이차이가 이별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것도 결국은 이별 이유의 또 다른 한가지일 뿐이다. 물론 큰 비중을 차지할 여지는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에게 다시 찾아올 사랑이 5살 이상 차이나는 연하남이라면 나는 그 사랑에 두려움없이 내 마음을 던질 수 있을까. 이 시기에 내 나이보다 위인 사람보다는 내 나이보다 아래인 사람과의 가능한 만남이 훨씬~~~ 많은데 과연 나는 그 연하남들을 진정한 나의 배우자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글쎄다. 지금의 나로서는 뭐라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하겠다. 하지만 연하의 띠동갑 남자가 내 운명의 남자라면 난 분명 그를 알아 볼 것이다. 그게 사랑이고 인연이라 믿으니까. 그나저나 지금 내가 바라는 하나가 있다면 그건 ‘이승기’같은 연하남과 멋진 열애를 하는 거다. ㅎㅎㅎ 


<기억에 남는 문장>


“여자가 남자한테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하는 건 아직 어리다는 증거야.”

“맞아. 남자는 알고 보면 귀찮은 존재라니까.”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여자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챙겨야 해.”

하지만 아사코는 여자가 누군가로 인해 행복해진다는 소망을 버릴 수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남자는 없을 거라고 매일 자신에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여전히 언젠가는 자신에게 딱 맞는 최고의 남자를 만날 거라고 믿고 있다. (p.42~42)


"운명은 잘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휙, 도망가는 법이거든.” (p. 71)


"연하 남자와 사귄다는 건, 자신의 나이도 재확인한다는 의미야.” (p. 165)


"전에는 나 자신의 연애 범위가 매년 좁아진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건 나도 모르게 동년배나 연상의 사람한테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거든.”

그 말에 미나코도 미호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데 연하남이랑 사귀면서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느 순간 남자를 보는 눈이 180도 변했어. 이렇게 넓고 밝은 세계도 있구나, 앞으로도 이 세계를 향해 나가보자는.” (p. 337)



Posted by 설해목